On the works of Jong hyun, An

Far Near Mid – Installation View
디지털 시대의 ‘순수’한 풍경:
안종현의 초현실적인 우주
고동연 (미술비평)
국내 사진계에서 안종현의 약진은 주목할만하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어언 100여 년을 넘었기에 고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다. 19세기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당시에는 사진이 변형할 수 없었기에, 디지털 시대에는 사진이 너무 변형이 쉬워졌기에, 이래저래 사진이라는 매체는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오히려 사진에서 진실성에 대한 기대감을 더 철저하게 포기하게 했다. 그리고 잃는 것이 있다면 얻은 것은 오랫동안 외부 대상 세계를 보면서 인간이 일상적으로 해왔던 자신만의 상상력을 대상에 투영하는 것이다.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안종현의 초현실적인 사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통로- #02 pigment print 155×190 2014
물론 안종현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이 단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의 산물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2011년 <붉은 방> 시리즈, 2015년 <통로>는 모두 오래되고 버려진 공간을 다룬다. 붉은 방은 거의 국내 모든 사진작가가 통과 제례처럼 거치는 종로의 뒷골목 홍등가를, <통로>는 인접한 종로의 아버지 병문안을 가는 길에 보았던 뒷골목을 찍는다. ‘통로’는 여기서 중의적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문화와 계층이 섞이고 서로 연결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통로’이기도 하고 그의 사진에서 보자면, 다른 초현실적 세계로 향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과장된 소실점, 무엇보다도 그의 눈을 끌었던 붉은 색, 표면의 질감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안종현의 사진은 이곳의 세계이지만 저곳에 속한 세계인 듯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시작의 불 factory – #01, pigment print, 155×195, 2019
안종현의 사진은 기본적으로 다루는 장소와 방식을 통하여 이탈 현실적인 인상을 빚어낸다. <시작의 불>(2019)과 <멀리 가까이 중간>(2020)은 이러한 측면에서 중요하다. 과도하리만큼 대상에 밀착해서 찍기 시작하면서 물리적인 공간감마저 사라진다. ‘멀리 가까이 중간’은 물리적인 거리감이 자연스럽게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인 시야를 소멸시키고 그야말로 우리의 시선이 대상의 표면 위로 유영하게 만든다. 전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으면 없을수록 보는 이의 시선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이 자유로워진다.
Landscape- Installation View
 작가는 사진을 찍기 위한, 그리고 찍은 후에 파생되는 모든 과정에서 사진 이 변화를 거듭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관객에게 가장 큰 영 향을 주는 것은 결국 대상과의 거리감일 것이다. 잘 알고 있다고 여기던 대 상도 멀리서, 가까이에서, 중간에서 보면 다 달리 보인다. 게다가 정중앙의 구도도 범상치 않다. 적정거리를 무시해버린 안종현의 사진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를 요구한다. 전체의 형태를 통하여, 그리고 맥락을 통하여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표면을, 대상의 특정 실루엣을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안종현의 사진은 그렇게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ARMY_2005

<죽음으로부터 면역까지>  

죽음으로부터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유작 『On Late Style』에서 예술가들의 말기 작업을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했다. 하나는 기존 작업 전반에 대해 회고하고 사회·정치·역사 전면에서 조화와 화해를 지향하며 자신을 향한 비판과 논쟁을 해결하는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 마지막 작업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전자가 예술가 자신의 인식과 현상학적 존재양식을 정리하고 도식화하는 안정적 작업이라면, 후자는 말 그대로 여력을 끌어모아 ‘죽자고’ 달려들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평판이나 성칭에 먹칠을 할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작업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더 흥미롭다. 기존의 자신을 얽매던 권력이나 형식을 벗어난 ‘시대착오적’ 창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가 마주한 죽음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있다. 최근에 조카가 태어났다거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저서 혹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취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갱신되는 생명력을 가진 대상에 흥미를 느낀다. 나에게는 작가 안종현이 그런 흥미로운 대상 중 하나다.

미래의 땅 – #01_pigment print 125×160 2013

나는 작가의 정체나 가치를 판단할 때 현재 작업의 완성도 보다는 지난 작업의 일관성을 중점에 둔다. 안종현 작가는 흥미로웠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정 형식의 사진에서 실력으로 고점을 찍었다고 판단할 무렵이면 그는 자신의 작업에 죽음을 선고한 듯 전혀 다른 차원의 사진들을 발표했다. <붉은 방>(2011)은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군부대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창촌을 기록한 작업이다. 욕망과 폭력의 역사가 응축된 극단적 내러티브의 전형인 공간을 중립적으로 다뤘고, 상징적인 오브제들을 균형과 아름다움을 가진 사진 이미지로 재현하여 이와 모순되는 현실의 문제들을 환기시켰다. 그다음으로 발표한 <미래의 땅>(2013)은 고두암에 대한 과거의 예언과 역사, 현실을 사진으로 확장해 새로운 미래, 예언을 촉구하고 순환적인 시간관을 상기시키는 작업이었다. 독일의 사진 양식을 연상시키는 대형 카메라의 균형 잡힌 프레이밍, 일정한 카메라 높이와 정확한 수평, 수직, 낮은 채도와 차가운 색온도가 돋보였다.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나 <붉은 방>에서 보여준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통로>(2015)에 이르자 낮은 채도는 사라졌고 공해에 가까운 종로의 다양한 시각기호들이 프레임을 채웠다.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종로의 오색찬란한 시각기호와 풍경을 낯설 만큼 정돈된 구도로 기록한 작업은 사진을 통해 현실에 잠재된 현실(잠재태)을 길어 올리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피사체나 공간이 아닌 자신을 향해있었다. <붉은 방>부터 <풍경>(2017)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의 작업에서 사진의 주체성과 사진가의 주체성 확립을 향한 미학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독립적인 가치나 정체를 판단하기엔 사진 이미지의 대상과 시각적인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다양했다. 개인의 미학적 성취를 넘어 사회, 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작가의 가치를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붉은 방#18_피그먼트 프린트_100x125_2011

정신과 미학으로부터

파괴된 집창촌, 강원도 산골짜기, 종로의 거리와 불에 탄 산 중턱, DMZ까지, 공간과 장소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작가 안종현의 중요한 전제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원론에 가까운 작가론은 기술 혁신에 따라 트랜스미디어 작업의 흥행하고 사진-디자인-디지털 이미지와 인화물 간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편협한 시각으로 치부되는 이 시점에선 다소 교조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사진의 독립적인 지위, 바로 ‘정신의 장소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래픽 작업만으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일러스트와 같은 벡터 기반의 이미지는 무한으로 확대되고, 가상의 공간은 창조가 가능하며 이들은 물리적인 공간과 밀접하게 결합해 있다. 이 공간들에 직접 갈 필요도 없이 스크린 위에서 창조하거나 원격으로 촬영할 수 있다. 더 이상 사진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실제와 가상을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물리적 사실을 직접 마주하는 원론적인 다큐멘터리 접근법은 사진을 통해 작가의 정신의 존재를 지표Index하고, 나아가 작품을 만들어낸 신체와 정신이 자리한 장소를 지표한다.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화부터 하이퍼리얼리즘 작품,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가상 그래픽 공간 작업, 현실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까지, 이들은 모두 자신을 창조한 신체와 정신의 장소를 동시에 지표하지 않는다. 물론 안종현의 사진에서 정신의 장소가 구체적인 좌표로 제시될 만큼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정신의 장소는 사진 속 공간과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 거리에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베르그송의 현상학에서 정신은 현실 세계를 감각하는 신체를 통해 구성되고, 다시 현실과 감각에 영향을 주며 순환하는 기억의 동태를 의미한다. 안종현의 작업에서 지표되는 정신을 구성하는 기억에는 전쟁을 피해 고향을 잃고 남쪽으로 피난을 온 아버지와 자신이 경험한 전쟁과 분단에서 위시하는 군대, 분단국가의 시민이자 사진가로서 관찰해 온 기형적인 도시 구조, 이념에 근거한 사회정치적인 분열, 아버지의 건강 악화와 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물리적 분리 등이 포함된다. 작가는 ‘현실로부터 분리된 현실’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음을 사진을 통해 확인시킨다. 이 현실들은 조밀한 중/대형 필름과 센서의 입자(픽셀)에 의해 세세하게 재현된 나무껍질, 철조망, 벽돌의 질감이나 익숙한 요소들로 구성됐지만 정작 실존하는 현실의 문제로서 마주한 적 없는 낯선 풍경을 통해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의 거리에서, 아름답거나 추하게 제시된다. 보는 이의 정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업들이 공통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사진 속 다소 반갑지 않은 현실 속에 위치한다는 사실과 이를 직접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생명력에 대한 가능성이다.

 

 

Far Near Mid – Psychiatric hospital- #01, pigment print, 150x320cm, 2020

몸짓과 조형으로부터

사진 이미지와 조형을 중심으로 안종현의 작품들을 살펴봤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는다.”이다. 작가는 제한된 기회 안에서 현장을 답사하고 가로지르면서 불특정 피사체와 풍경을 기록하는 전형적인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 방식을 취한다. 정해진 형식 안에서 조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유형학이나 스튜디오 사진과는 거리가 멀지만 모든 이미지는 마치 당연히 그렇게 포착되어야 했던 것처럼 구도적, 조형적 안정성을 갖고 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철조망 이미지나 정신병원에서 포착한 하늘색 커튼 이미지는 이미지 안에서 완결적 구조를 갖춘 디자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조형적 특징은 작가의 카메라, 카메라 워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중계하고 전통적으로 사진으로 칭해지는 암실 인화나 잉크젯 프린터만 거치면 어떤 이미지도 사진으로 구분하며 빈곤한 이미지가 커뮤니케이션의 주류인 이 시점에서 카메라에 대한 논의는 아마추어 동호회나 SLR클럽 같은 대중적인 사진커뮤니티에서나 주목할 법한 기초적인 사안으로 다뤄지곤 한다. 그러나 알렉 소스Alec Soth,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같은 사진작가의 작가노트나 비평문, 가고시안, MOMA의 소개문에 대형 포맷 카메라 활용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카메라는 여전히 사진 이미지의 형식과 사진가가 기록할 현장을 마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ARMY_2005

 안종현의 가장 초기작 중 하나인 <군대>(2005-2007)시리즈나 <붉은 방>을 살펴보면, 여러 작품이 35mm 소형 카메라의 유연하고 다채로운 위치와 렌즈의 원근, 수차 왜곡을 활용했다. 구도적으로 피사체의 형태를 강조하고 시선의 흐름을 유도하여 주제를 둘러싼 잠재된 내러티브를 강조했다. <미래의 땅>에서는 건축, 인테리어 사진 수준의 통제된 왜곡과 직선적인 프레이밍 등 완성도 높은 대형 카메라의 카메라 워크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미래의 땅>의 피사체가 하늘로 뻗은 바위와 근대의 직선-콘크리트 건축물이었지만, 삼각대를 포함해 통상 10kg에 달하는 대형 카메라로 낯선 현장을 안정적으로 촬영하는 것은 DSLR을 들고 이런저런 사진을 시도해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아마 작가가 사진을 전공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대형 카메라를 다뤄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015년 <통로> 이후의 <풍경>과 같은 작업들에서는 중형 디지털 백의 장점을 살려 왜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폭넓은 피사체와 다양한 구도의 풍경을 담아냈고, 경우에 따라 35mm와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상징성 있는 존재들의 초상사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구축된 다양하고 정밀한 카메라 워크는 <시작의 불>, <멀리 가까이 중간>의 DMZ, 정신병원, 미군기지 작업에서도 돋보인다. 타버린 나무의 뿌리, 강바닥에 놓인 주인 모를 의자, 국경 너머의 하늘을 비추는 바닥에 고인 물과 같이 우연으로 마주한 대상들을 필연적으로 느껴질 만큼 안정적인 풍경으로 포착해낸다.

시작의 불 – forest #01, pigment print, 140×185, 2019

하지만, 이러한 사진 이미지의 구성 능력이 오로지 카메라에 의존하여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선배들의 말처럼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고, 카메라가 눈의 연장이라면, 이러한 성취는 현장을 마주하는 사진가의 숙달된 신체와 신체적 수행에 의해 완성된다. 사진이 기술, 물체, 매체와 같은 객체인 동시에 대상을 마주하고 기억하고 시각화하는 실존적인 몸짓,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작가의 ‘사진하기’의 수행은 퍼포머의 수행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정신의 재현, 현상학에서의 육체에 초점을 맞춘 근현대적 무용의 관점은 물론 이를 둘러싼 정동과 변수, 균열을 중심으로 하는 동시대 무용의 관점에서도 퍼포머가 육체를 매개로 개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적인 틀을 이룬다. 개인의 실존, 이 추상적인 목표는 흥미롭게도 물리적인 두 개의 조건을 전제로 한다. ‘(몸에)쌓임과 체득’이다. 가령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팔을 살펴보면 아주 얇은 경우에도 요측수근굴근만은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발레에서 팔의 곧은 선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팔을 고정시키고 손목을 돌려 팔꿈치 안쪽과 손바닥이 같은 방향을 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리의 경우 일반인보다 고관절 운동 전반에 사용되는 봉공근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꼭 발레가 아니더라도 물리적인 실천과 반복을 통해 몸에 쌓인다. 몸에 쌓인 근육들은 기술적인 동작의 섬세한 재현과 무대 위 실전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반복 속에서 무용수는 자신의 정신에서 비롯된 감정을 몸에 불어넣고 현장과 상호작용하며 특정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존하는 방법을 체득한다. 무용수, 즉 퍼포머의 쌓임, 체득과 같이 사진가,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기술적인 카메라 워크는 자신의 시선과 재현의 방식, 나아가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는 수행으로 확장된다. 물론 퍼포머의 정신이 육체적 재현과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등치 하지 않는 것처럼 사진가의 정신 역시 사진을 매개로 완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관객으로부터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존의 가능성을 체득한 신체는 더 이상 질량이나 강도에의 종속없이 적어도 작가 본인의 실존을 담보한다. 카메라의 현실에 대한 기술적 재현과 작가 본인의 감상에 기반한 주관적 재현, 안종현의 작업도 그 사이에 자리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사진의 매체적 특성과 실존적 수행, 양단의 팽팽한 균형 위에서 ‘운이 좋다면’ 합리론과 경험론, 구상과 추상, 물질과 기억, 현실과 가상으로 끝없이 확장되어 온 철학적 논쟁에 대한 최소한의 해소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시작의 불 factory – #03, pigment print, 140×185, 2019

면역으로까지

전시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를 구성하는 <멀리 가까이 중간>(2020)은 분단의 현실을 지축으로 하여 작가의 기억이 향하는 곳에서 몸이 체득한 방식으로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기록한 작업이다. 일반적인 풍경 기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사진들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자연’스럽지만 정치적 이념과 권력에 의해 분단되어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DMZ의 ‘부자연’스러운 현실을 담고 있다. 혹은 사진으로 마주했을 때 낯설고 부자연스럽지만 이 땅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미군기지, 정신병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극히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작가의 기억은 <군대>, <붉은 방>부터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서사를 구축한다. 하지만, 안종현의 작업은 감성적 에세이가 아니다. 이미지들을 개별적으로 봤을 때 구조주의, 기호학적 해석이나 도상해석학적 접근을 요구하는 요소들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사진 이미지가 위치한 1/n 밀리의 스크린, 혹은 약 0.4mm 두께의 인화지의 앞, 뒤, 옆, 위, 아래에 있는 작가와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감정이다. 이 서사는 쓴맛이 나고 다소 멀게 느껴진다.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오늘날 우리는 거리 두기에 익숙하다. 전 지구적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거리 두기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기도 한다. 전쟁과 분단의 상황에서 상대와의 적정한 거리 두기에 대한 논쟁은 국가를 양극단으로 분열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애도와 추모, 상실과 상처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외면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문제를 수많은 외부의 스펙터클 중 하나로 남겨 놓는다. 이 단절의 종말은 결국 면역이 필요하다. 면역을 위한 항체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원인(항원)을 마주해야 한다. 이는 무수한 논쟁과 불쾌한 미열을 동반한다. 이미 죽었거나 약해진 병원체라면 그 과정이 수월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하지 못하다면 면역에 이르기 전 병원체에 의해 더 큰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방접종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독감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일을 뒤로 미루곤 한다. 그렇다면, 전시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와 당신의 거리는 어떠한가? 복잡한 미학과 현실의 문제들이 머릿속을 두드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완전히 외면하고 거리를 둘 수도 있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를 구성하는 사진들로부터 무엇을 느끼고 그 감상과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는 풍경의 조형적 아름다움 혹은 추함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사진 속 존재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나 기억, 정치적 견해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 감상들은 가슴 깊숙이 들어와 감동을 주거나 혐오를 유발할 수 있고, 적절한 거리에서 타인에 대한 추모와 애도를 촉구할 수도 있으며, 먼 거리에서 그저 객관적인 정보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 거리가 어떻게 됐든 그 곳에 정답은 없다. 우리는 사진 바로 앞, 혹은 표면 바로 위에 다가갈 수 있지만 작가의 진정한 의도, 촬영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상황을 완벽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작가는 사진의 뒤편에 있고 문제의 해결방법은 어디에, 얼마나 멀리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이에 있는 사진, 그저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없이 무자비하고, 차갑고, 비참한 객관적 사실, 혹은 상처와 기억들이 담긴 신체가 통감한 주관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 이들로부터의 면역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업의 제목 ‘멀리 가까이 중간’은 사실, 군대에서 사격을 연습하는 순서이기도 하다. 멀리, 가까이, 중간에서 표적을 겨냥하는 것은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필요하지만 전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멀리, 가까이, 중간에서 현실의 문제들을 직시하는 이 전시 역시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전시는 답한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거리, 그 사이에 우리의 통로가 되어줄 사진이 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사진이 있다.’ (김진혁)

Far Near Mid – 미확인 지뢰 지역- #02, pigment print, 150x320cm, 2020